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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제14장 작사 배경, 한영서원 입학생을 위해국가(國歌) 애국가는 동·서·남해의 바다와 백두대간을 ‘무궁화 삼천리 우리나라’로 규정하고 충성을 다하자는 기원으로 시작한다. 가을하늘 밝은 달과 같은 불변의 기상으로 충성을 다 하자자고 맹세한다. 어떤 애국가보다 참신한 가사로 애국심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1907년 작사이니 116년간이나 ‘찬미가’ 10장 등과 길항(拮抗)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과연 이 역사적인 전승을 가능케 한 이 노래의 작사 배경은 무엇일까? 제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제2절 남산 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제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제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 애국가의 원본(原本)은 1908년 출판사 광학서포에서 발행한 1908년 윤치호 역술 재판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이다. ‘Patriotic Hymn’(애국적 찬미가) 전 4절은 다음과 같다. Patriotic Hymn 뎨十四 Auld Lang Syne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그런데 이 가사가 실제 작사된 것은 ‘찬미가’에 발표에 앞선 1907년 작사했다는 문건이 존재한다. 이를 주목한 사실이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 1919~1985/1949년 월북)의 1948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故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박은용의 이 주장 근거는 바로 1945년 9월 윤치호가 작고 직전에 가족의 요청으로 남긴 ‘자필 가사지(自筆 歌詞紙)’의 확인이다. 이에 따르면 4절 가사와 그 끝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기록하였다.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룬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을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야 괴로우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 윤치호의 막내 딸 문희가 "개성 부친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찬미가’를 옆에 높고 달라진 부분은 고쳐 직접 쓴 것”이다. 1945년에 썼지만 작사 년대는 1907년임으로 ‘作’이라 하였다. 서법상 "一九0七年 尹致昊 書”로 썼다면 위작이지만 옳은 표기이다. 이로서 ‘찬미가’에는 번역 찬송가 12편과 자신이 작사한 3편을 포함하여 일부 譯(번역)과 일부 述(지음)이란 의미로 ‘譯述’이라 했지만, 이 가사지에서는 제14장의 가사 4절만을 기록하여 ‘作’(작사)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또한 가사지의 철자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미 1908년 재판 ‘찬미가’에도 동일하게 썼음으로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윤치호는 이미 한글 철자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즉, 1896년 1월호 「Korean Repository」에 필명 T. H. Y로 ‘점 찍기’와 ‘띄어쓰기’를 주장했고, 최근 필자가 확인 한 독립신문 1897년 5월 27일자는 ‘아래 아자’ 폐지를 주장한 기록에 확인이 되기도 했다. 이상에서 확인하였듯이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윤치호가 작사하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제 윤치호가 어떤 배경에서 작사했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앞서 제시한 1907년 전후의 윤치호 상황을 전제로 정리하기로 한다. "내가 모은 돈 200달러를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이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습니다.” 이 간절한 요청은 윤치호가 1893년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상해 모교 ‘중서서원’ 교수로 떠나면서 캔들러 교수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이미 이 시기에 학교설립을 계획했음을 알게 하는데, 어려운 유학 여건에서 모은 200달러를 학교 설립 기금으로 내고 캔들러 학장의 협조를 청한 것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위한 이 계획이 당신의 뜻이라면 오! 하나님이시여. 어떤 것도 이 계획이 성공을 방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응답으로부터 13년만인 1906년 초, 캔들러 학장은 남부 감리교 감독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이 때 윤치호와의 약속을 실천하게 되었다. 결국 윤치호의 염원이 미국 남부 감리교 계열 미션 스쿨의 지원으로 ‘한영서원’(韓英書院, Anglo-Korean School)의 개교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당연히 초대교장은 윤치호가 맡게 되고, 첫 해 14명의 학생을 맞아 개교하였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 교가(校歌) 곡조에 윤치호가 작사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동포사랑은···”로 시작하는 교가를 준비하고, 이상춘과 김동성(金東成) 등의 교사와 함께 개교 하였다. 개성 송악산 산지현에 초가지붕을 얹은 뜸집(띠나 따위로 지붕을 이어 간단하게 지은 집)의 학교 개교식은 10월 3일 개최했다. 한영서원 학칙에 의하면, 한영서원은 인문교육 및 실업교육을 하는 곳으로 학과는 소학과 4년, 영어전수과 2년, 고등과 3년, 반공과(半工科) 3년 등의 과정이 있었다. 소학과에서는 수신,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산술, 이과, 도화, 창가, 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고, 고등과에서는 도덕,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수학, 영어, 음악, 체조, 지리, 도화, 작문, 과학을 가르쳤다. 반공과는 고등과에다 실업과목을 더해서 가르쳤고, 일주 27시간의 수업을 하였다. 학생은 15세 이상의 남자로 신체건강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보통 국한문에 통달한 자로 하였다. 이 학교는 특이하게도 지원, 즉 분교도 운영하였다. ‘한영지서원(韓英支書院)’인데, 경기도 포천에 두고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본교와 같이 실업 교육 중시, 근로정신 고취, 노동 천시 폐습 타파 등을 통해 청년들의 경제적 자립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설립 목적이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하였음으로, 포천 지역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사용 금지령을 내렸던 ‘초등본국역사’를 교육하는 한편 ‘영웅의 모범’이라는 애국창가집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런 교육목표와 실제 수업은 1910년 이후 총독부의 감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교식 당시는 입학생이 14명이었으나, 1908년에는 225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해에 9월에는 대지 12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웅장한 현대식 석조 건물로 교사를 신축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런 학교의 확대를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1911년 초대교장 윤치호를 105인 사건으로 투옥시키고 교장을 교체시켰다. 1913년 2월 10일 크램(W.G. Cram)으로, 3대 교장으로 1914년 9월 1일 왓슨(A.W. Wasson)을 취임시켰다. 윤치호의 활동상을 최대한 압박한 것이다. "윤치호는 고(故) 남작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으로 어려서 도쿄(東京)에 유학가고, 그 후 상해에 가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에 도항(渡航)하여 그곳에서 유학한 지 5년 후 귀국하여 의정부참의(議政府參議),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고 그 다음 외부협판(外部協辦)으로 전임하여 제1차 한일협약(1904) 성립의 결과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등에서 원장 및 교장을 맡고 있으면서, 위의 협약(한일협약, 1904) 체결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11년 ‘신민회 105인 사건’의 윤치호 판결문의 일부이다. 윤치호의 주요 이력 중에 한영서원 원장과 대성학교 교장 엮임을 주목하였음이 확인 된다. 이런 처지에서 한영서원은 이후에도 일제의 감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로 ‘애국창가 사건’도 적발되었다. "당시 이경중 목사가 동간도에서 수집, 보관하고 있던 창가를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 이상춘이 제공받은 다음,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를 포함하여 2권의 창가집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제1권은 1914년 8월 25일 40부를 인쇄하여 한영서원 및 호수돈여학교 생도에게 발매·반포했고, 이어 제2권은 1915년 9월 90책을 인쇄·반포 하였다.” 1916년에 발생한 ‘애국창가집사건’에 대한 경기도 경무부 보고 ‘불온자 발견처분 건’ 보고서의 일부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개성경찰서 순사가 한영 서원에서 불온창가를 출판, 반포한다는 정보를 입수, 조사한 결과, 1915년 8월 15일 해당 출판물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비롯되었다. 국가 흥망성쇠의 열쇠가 곧 국민정신에 있다고 인식하고, 국민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조국을 생각하는 노래, 독립군가, 애국가를 모아 창가집을 만들었다. 내용에는 ‘영웅의 모범’, ‘선죽교’, ‘구주전란’ 등 다양하였으나 그 중에는 일본의 황제나 황가에게 모욕적인 내용을 담은 곡이나 역대 영웅적인 인물의 반일사상을 표현한 곡들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사인 외 6명은 창가의 편찬에 관여한 혐의, 전 교사 유봉은 그 재료를 제공한 혐의, 음악교사와 생도들은 창가를 연주한 행위, 신공량은 타인에게 창가집을 증여하고, 오립아·오연거는 창가집을 호수돈여학교 생도에게 발매·배포한 혐의를 받았다. 신영순·백남혁은 징역 1년 6개월, 정사인·오진세·이경중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한영서원 교사·교직원·졸업생·재학생 등 23명이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애국창가집사건’으로 탄압 받은 첫 사례이다. 그런데 이 중에 핵심 애국창가는 바로 애국가였다. 조서에 언급되었듯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로부터 ‘애국 창가’를 모아 노래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윤치호’, ‘한영서원’, ‘애국가’, ‘창가사건’은 결국 윤치호의 애국가로부터 발단 된 것임을 알게 한다. 이상에서 살핀 바에 의하면 관직을 떠나 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 1905년으로부터 1911년까지의 5년은 결국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대성학교 교장직을 겸하는 과정이 가장 큰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1907년에 애국가를 작사한 것은 바로 학생들, 구체적으로는 1906년 10월 입학한 한영서원 학생들을 위해 새로운 애국적 찬미가 14장을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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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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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서편제’, ‘한(恨)’의 현대적 재해석무대는 단색 톤의 하늘거리는 한지로 수놓아져 있다. 떠도는 유랑생활과 ‘소리’를 찾아 나서는 인물들의 불안한 관계를 반영하는 듯하다. 뮤지컬‘서편제’의 무대이다. 영화의 미장센(배경, 시각적 요소) 대신, 최소화한 세트와 영상으로 시공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고, 세트의 한지 재질감은 ‘서편제’ 전체를 관통하는 전통의 정서(한恨, 그리움)를 일관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동할 수 없는 무대의 한계는 조명과 어우러진 영상은 물론, 배우의 집중도 있는 열연과 서사와 인물을 반영하는 곡들로 채워져,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초반에 등장하는 노년의 ‘송화’, 이자람 배우의 첫 대사는 굵직하고 나지막하다. 소리꾼으로서의 지조를 오롯이 보여주는 강인함 그 자체이다. 그녀의 묵직한 한마디에 관객은 처음부터 편안하게 ‘송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뮤지컬‘서편제’, ‘소리’의 가치를 찾아가다 초반부터 극을 이끌고 있는 가치가 있다. 바로 ‘소리’. 극은 일관되게 동호의 누이 ‘송화’로 상징되는 ‘소리’를 찾는 여정이다. 그가 애타게 찾던 ‘소리’의 의미는 시기마다 다르다, 유년기에는 ‘햇덩이’로 표현되는 아버지의 억압, 가출 후 젊은 시절의 ‘소리’는 자유롭게 발산하는 ‘젊음과 열정’, 중년의 ‘소리’는 자신 삶의 태초부터 풀지 못했던 그리움이자 한이었다. ‘소리’는 또한 유봉, 송화, 동호에게 각기 다른 의미이면서, 살아가는 중심 이유이기도 하다. 또 인물 간 갈등이 시작되고, 이별하고 그리워하는 극의 중심 소재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극이 보여주는 소리의 의미는 어린 시절 늘 소망하고 갈망했던, 어쩌면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삶을 아우르고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자 지향점이다. 누구는 그것을 꿈이라고, 그리움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있었기에 우리는 고민하고, 때로는 고뇌하며, 노력했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역시, 그들의 ‘소리’와 같은 가치가 하나씩은 있지 않을까. 갈등을 풀어가는 또 하나의 중심 서사는 바로 ‘시간’이다. 작품이 삶의 일대기를 다루고, 액자구성을 취한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1막 마지막 곡 ‘시간이 가면’(넘버 22)에서는 각기 다른 가치로 시간을 말하고 있고, ‘혼자 있는 자유’(넘버 03) 곡의 ‘시간은 절로 가고, 넌 자랄 거야···.’라는 가사에서도 동호는 엄마와 교감하며, 그리움의 실체와 ‘소리’를 찾아간다. 그 가운데 관객은 인물이 추구한 궁극의 ‘소리’를 찾는 과정에서 ‘시간’이라는 기차에 함께 탄다. 소소한 극적 장치 특히, 작품의 감동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과거-현재의 송화, 동호와 함께’하는 노래하는 장면들을 활용한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과거의 인물들에게 투영시키며, 인물의 감정을 표현한다. 또 하나, 무대에서 그림자로 투영되는 자신의 아련한 모습은 관객에게 어린 시절의 인물을 떠올리고, 인물의 애틋한 감정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인물과 배우 사이 송화, ‘소리’ 그 자체 동호가 찾던 ‘소리’의 가치를 가진 실체이며, 유봉이 추구하던 ‘완벽한 소리’의 대상이며, 자기 자신 자체가 ‘한’이자,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실체이기도 하다. 사사로운 개인의 욕망 따위는 과감히 버리고,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인물. 늘 그 자리에 있었기에, 모두가 추구했던 가치를 품은 대상, 극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이자람’이라는 소리꾼은 ‘송화’라는 인물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하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국악과 현대음악을 넘나드는 능수능란한 창법, 때로는 강렬한 창법으로 ‘한’을 표출하는 절규(1막끝), 마지막 장면 남매의 ‘심청가'(넘버 37, 심봉사 눈 뜨는 대목)에서는 노년의 송화의 한(恨) 서린 감성은 물론, 그녀의 콘서트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르익은 소리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배우의 완성도 높은 노래와 연기는 보는 이를 편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배우이다. 동호, 소리와 소리꾼 김준수를 알리다. 이자람에 이어 소리꾼 배우로서 참여했다. 국립창극단 10년차 단원답게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국악과 대중음악의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동호’의 오디션 장면에서, 짧은 판소리 대목에도(‘춘향가 중 어사출도’ 대목) 숨길 수 없는 소리꾼 본능과 탄탄한 실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관객들의 박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남매의 ‘사랑가’에서, 풀이 죽은 동호가 누이의 설득에 못 이겨 무심한 듯, 절묘하게 맞추는 북장단은 극의 소소한 재미를 주며, 소리꾼 김준수를 한 번 더 각인시켰을 장면이다. 마지막 남매의 ‘심청가’에서 고수로서 누이의 소리를 마주하며 받쳐주는 장단과 추임새는 극의 몰입도를 더하는 것은 물론, 판소리에서 ‘고수’라는 역할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대중에게 일깨워주기도 했다. 유봉, 광기어린 열정은 어긋난 부정으로 그의 소리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을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외로움을 알면서도, 그것마저 외면하고 완벽한 소리만을 추구하는 자유를 택했다. 동호 엄마가 동호에게 부르는 노래 ‘혼자 있는 자유’(넘버 03) 중, ‘혼자 있는 자유는, 혼자 있는 외로움’이라는 가사는 오히려 유봉에게 어울릴 지도 모른다. 극을 보는 내내 소리에 집착하는 가부장적 인물로만 해석되는 유봉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딸의 눈을 멀게까지 하면서, 이루지 못한 소리를 완성하고 싶은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보았다. 그가 지탄받는 이유는 ‘가족’, ‘사람’이라는 가치 위에, ‘소리’라는 무형의 목표를 놓았기 때문이다. 남경주는 상대 배우를 향해 때로는 광기어린 눈빛으로, 혹은 무심한 냉대로 한 치의 교감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이중의 연기를 한 것 같다. 최고의 노래, 장면, 사람들 인상적인 노래 많은 곡 중, ‘살다보면’(넘버 06)을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곡으로 꼽지만, 기자는 ‘소리~ 내가 기억하는 소리···.’이라는 가사가 있는 ‘거대한 햇덩이’(넘버 02,04,31)라는 곡이 인상적이었다. 이 곡은 동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억압, 엄마의 고된 삶에 대한 안타까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떨쳐낼 수 없는 ‘소리’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했던 곡이다. 때문에, 극 안에서 3개의 버전으로 불려졌다. 인상적인 장면 긴장의 최고조로 강렬한 극의 정점, 1막 마지막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1막 마지막 순간이다.(‘시간이 가면’, 넘버 22) 송화는 자신의 한을 극대화하며 절규하고, 유봉 역시 딸에 대한 깊은 자책감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완성을 위해, 광기어린 야망을 보여준다. 부녀가 공존하는 공간(무대)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지만, 두 인물의 내면은 서로 다른 이야기로 치닫으며, 긴장의 최고조를 보여주며 강렬하게 1막을 내렸다. 뜻밖의 재연과 감동, 2막 마지막 극의 초반, 노년의 송화와 동호가 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구성을 취한다. 또 하나, 마지막 장면에서 이 둘의 만남의 장면이 재연되며, 인물의 감격과 극적 감동을 더한다. 마치 시(詩)의 ‘수미쌍관(수미상관, 시의 첫 연을 끝에 반복하는 문학적 기법)’을 연상하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만남의 재연은 초반에서 주었던 긴장·궁금증과는 다른, 마치, 수학문제의 해답으로 가는 과정의 귀결과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관객들의 시간적 감정선을 극의 초반으로 끌어 올림과 동시에, 구성의 인과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하고, 마지막 감동의 깊이를 더했다. 인상적인 사람들 앙상블 배우 장면마다 극에 몰입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앙상블배우들의 활약 덕분이다. 주연배우는 하나의 감정선을 가지고 끝까지 가지만, 이들은 무대마다 매번 다른 감정의 옷을 입고, 강렬한 군무와 수려한 가창력으로 찰떡 같이 소화해냈다. 주연배우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극의 틈새를 완벽하게 매워줬으며, 덕분에 관객은 장면과 인물들의 감정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동호 엄마 동호의 방황과 혼란에 늘 함께 있던 존재가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 그의 삶에서 풀지 못한 숙제이자, 괴로움, 그리움의 원천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동호와 함께 하며, 동호의 괴로움, 그리움을 교감한다. 시작 인물로서 ‘동호-유봉’의 갈등, 극의 중요 순간에 매번 등장하며, 각 인물의 내면과 갈등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채태인 배우의 극에 녹아드는 연기와 감성, 뛰어난 가창력은 주연배우 못지않은 감동을 선사했다. 소리꾼 배우들이 주는 감동 ‘판소리’라는 전통 소재를 바탕으로, 현대적 소재와 음악을 가미한 작품이다. 때문에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이 공존하고 있어, 이 두 장르의 음악을 모두 소화하는 것은 극의 몰입에 매우 중요하다. 소리꾼 이자람, 김준수 배우는 이 점에서 극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극에 삽입되는 판소리, 혹은 국악적 요소가 가미된 가창에서 소리꾼 배우들은 곡들이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다가가도록 돕는다. 특히 남매의 ‘심청가’ 장면이 최고의 장면으로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배우들은 송화와 동호의 감격을 판소리 ‘심청가’의 소리꾼과 고수로서 오로지 ‘판소리’만으로 교류하며 감정선을 극대화했다. 소리꾼 이자람 배우는 탄탄한 실력으로 판소리 ‘심청가’의 감동뿐만 아니라, 노년의 송화가 가지는 한, 동생을 마주한 감격을 소리에 녹여냈으며, 소리꾼 김준수 배우는 고수의 절제된 장단과 추임새만으로, 평생을 찾던 누이와 재회의 감격을 부족함 없이 표현해냈다. 소리꾼 배우 ‘동호’가 아니라면, 완성될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인물의 관계에서 보는 삶의 다른 색채 남매인 듯 연인인 듯, 동호-송화 작품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모자(母子)와 연인을 넘나든다. 아마도 어떤 관객은 마음속으로 연인의 관계로 이미 발전시켰을 수도, 어떤 관객은 연인의 애틋함까지 가질 정도의 끈끈한 가족애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동호는 송화에게서 어머니의 모성을 느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보호자가 되려하기도 한다. 중년이 되어, 마지막 ‘심청가’의 장면에서, 그녀의 동생이자 연인, 아들까지 된 듯 행복과 감격을 느낀다. 송화에게 동호는 소리가 전부인 자신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정을 느끼고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 수 있게 한 인물이다. 가족이기에, 유봉-송화 유봉은 가족이기에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리를 송화에게 완성시키려 하고, 송화는 가족이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지키려 했다. 유봉은 ‘가족’이라는 가치 위에 ‘소리’라는 가치를 올려놓았고, 송화는 아버지의 딸이자 소리꾼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아버지 유봉의 ‘소리’는 광기에 가깝다면, 송화의 ‘소리’는 역사 속 한국 여성으로 상징되던, ‘한’이고, ‘가족’이고 ‘지켜야 할 것’, ‘결코 흔들리지 않은 강인함’이다. 어쩌면, 송화는 아버지보다 강했고, 아버지(유봉)가 오히려 송화에게 의지했을 지도 모른다. 애증의 관계, 유봉-동호 유봉은 사랑했던 여인이 가졌던 소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동호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소리를 가르치려 하지만, 동호의 강한 반감을 보듬지 못하고 멀어지기만 한다. 동호에게 있어 유봉은 유년, 청년시절 원망의 대상이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은 그의 음악과 소리는 유봉에게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유봉과의 인연은 애증의 관계로 끝났을지언정, 그의 음악의 시작은 유봉이라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막이 내리자, 관객들은 감동을 보답하듯,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배우들은 정중한 인사 후에, 객석을 향해 환한 미소로 화답하거나, 감격에 찬 듯 진지한 표정으로 객석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모든 얼굴에는 한결같이 감동과 감사가 교차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2시간 30분의 긴 공연에서 지치지 않고 관객의 환호에 답하기 위한 커튼콜에 달려오는 이자람 배우의 날아갈 듯한 발걸음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 이 무대를 진짜 즐겼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배우를 어떻게 관객이 믿지 않을 수 있는가. 뮤지컬‘서편제’는 영화 ‘서편제’와의 저작권 사용기간 만료로 인해, 올해 공연이 마지막, 다섯 번째 시즌이다. ‘판소리’라는 소재로 대중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을 모으고 있다는 강점이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지 못한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공연장으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서울 공연은 이번 주 10월23일(일)까지이며, 이후 충북 청주(11월 25-27일), 부산(12월 23-25일)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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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못 잊도록 생각이 나거든 이십오여 년 전 언론인 L씨로부터 시인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이 쓴 엽서와 편지 이십여 통을 얻었다. 이 편지는, 평북 철산(鐵山) 출신으로 중국 상해와 봉천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주필·부사장을 지낸 유봉영(劉鳳榮, 1897-1985)에게 보낸 것들이다. 안서는 고향 정주(定州)에서, 철산과 경성, 중국 봉천으로 옮겨 다닌 친구 유봉영에게 편지와 엽서를 보냈는데, 1919년 편지에는 ‘안서용고(岸曙用稿)’라는 글자가 인쇄된 오백칠십육 자(24×24) 전용 원고지를 사용하고 있다.(*사진 42~43) 또 다른 이백사십 자(12×20) 원고지에 쓴 1922년 3월 23일 편지에는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의 「못잊어」를 연상케 하는 내용의 시가 적혀 있다.(*사진 44) 「못잊어」풍의 시가 들어 있는 안서의 편지는 모두 넉 장이다. 안서는 여기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다고 시시콜콜하게 적고 있다. 문제의 시는 안서가 친구에게 자신의 심각한 고민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면서 소개됐다. 狂人? 泥醉? 戀愛熱中? 이 세 가지만이 現實世界의 모든 苦痛에서 自由롭게 하여 주는 듯합니다. 眞正한 告白을 하면 나는 그 동안 웃읍은 로맨쓰를 가젓읍니다. 그것은 아모것도 몰으는 十七歲의 所謂 生離別리와 놀앗읍니다. 한데 그것이 郭山一周에 갓득히 所聞이 낫읍니다. 하고 저 便에서는 共同生活을 請하여, 참말로 ᄯᅡᆨ하엿읍니다. 만은 그것도 이제는 지내간 ᄭᅮᆷ되고 말앗습니다. 온갖 힘을 다하야 다른 곳으로 살님 가도록 하엿읍니다. 罪를 지엇읍니다. 그러나 엇지합닛가. 사람의 맘이란 물과도 갓고 바람과도 갓튼 것이매. 그것을 엇지합니가. 日前에 이러한 말을—그말은 쓰지 안읍니다—듯고 卽興으로 詩하나 지여주엇읍니다. 안서가 열일곱 살짜리 애인을 떠나 보내며 즉흥으로 지은 시에는 제목이 없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못닛도록 사모차게 생각이 나거든, 야속하나마 그런데로 살으십시구려, 그려면 더러는 니저도 집니다. 못닛도록 살틀하게 그립어오거든 설으나마 세월만 가라고 합시구려, 그러면 더러는 니저도 집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럿케 말하겠지요, "사모차게 생각나는 못니즐 당신을 그대로 생각을 안는다고 니저바리며, 살틀하게 그립어오는 못니즐 당신을 그런대로 세월을 보낸다고 닛겠읍닛가?” 소월은 이와 비슷한 시를 1923년 5월에 발간된 『개벽』 35호에 처음 발표했다. 발표 시기는 안서의 편지보다 두 달가량 늦다. 『개벽』에 발표된 시는 「사욕절(思慾絶) I,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라는 제목으로, 『진달래ᄭᅩᆺ』에 수록되기 전의 작품이다.(발표 당시 제목)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歲月만 가랍시구려. 그러면 더러는 닛치겟지요, 아수운대로 그러케 살읍시구려. 그러나 당신이 니르겟지요, "그립어 살틀이도 못닛는 당신을 오래다고 생각인들 떠지오릿가?” 그리고 이는 다시 1925년 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꽃』에 「못니저」(발표 당시 제목)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니칠날 잇스리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니저도 더러는 니치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럿치요, "그립어 살틀히 못닛는데, 어찌면 생각이 떠지나요?” 안서의 편지에 실린 시와 『개벽』에 발표한 소월의 시 「사욕절 I, 못잊도록 생각이 나겠지요」 그리고 『진달래꽃』에 수록한 「못잊어」는 시어와 리듬에서 차이가 날 뿐, 같은 시가 개작을 통해 변모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만큼 내용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안서는 소월에게 특별한 스승이다. 안서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소월의 시재(詩才)를 발굴해 키웠으며, 그를 문단에 데뷔시키고, 소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 스승이 되어 주었다. 안서는 소월이 쓴 대부분의 시를 미리 받아 첨삭(添削)·정서(正書)한 다음 잡지사에 넘겼다. 이런 작업은 소월 사후에까지 이어져, 소월의 유고를 손질해 각종 잡지에 발표하고, 『소월시초』(1939), 『소월민요집』(1948)을 펴내기도 했다. 안서가 편지에 쓴 문제의 시는 소월이 『개벽』에 「사욕절 I, 못잊도록 생각이 나겠지요」를 발표했을 때보다 두 달가량 앞섰고 시를 쓴 동기가 분명한 만큼 원작자가 안서일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점은 안서의 또 다른 편지에 실린 시 「사향(思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9년 5월 15일 경성에서 쓴 이 시는, 안서의 첫 시집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에 같은 제목으로 조금 변형되어 실려 있으며, 『진달래꽃』에 수록된 소월의 시 「제비」와 비슷하다. 「사향」의 첫 행 "공중(空中)에 나는 제비의 몸으로도”와 「제비」의 첫 행 "하눌로 나라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는 거의 똑같다.(*사진 45) 소월의 대표작인 「못잊어」와 「제비」의 원형을 밝힐 수 있었다는 점 외에도, 안서의 편지들은 근대문학사와 관련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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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판소리연구원, 창작판소리 ‘전태일’ 제작발표회 및 언론 시연회 개최창작판소리연구원(예술총감독 임진택)은 전태일50주기를 맞아 제작한 창작판소리 <전태일> 언론 시연회를 11월 4일(수) 오후 시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한다. ◇제작발표회 개요 제목: 창작판소리 ‘전태일’ 제작 발표회 일시: 2020년 11월 4일(수) 오후 4시 장소: 전태일기념관 2층 다목적공연장 참가자: ㄱ. 제작단체 - 창작판소리연구원(임진택 예술총감독, 양정순 총괄제작자) - 전태일50주기범국민행사위원회(위원장 이수호) -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노조위원장 이상수) - 금속노조 기아자동차(노조위원장 최종태) ㄴ. 작품 창작자 - 임진택 명창(사설, 작창, 소리) - 전태원(청년 전태일) - 양승은(시다, 미싱사, 어머니) - 최효동(고수) - 배재정(목격자, 아버지) - 박선봉(목격자, 근로감독관) - 김호정(목격자, 형사) - 상여소리 합창: (60~70년대 원풍모방, 청계피복, 삼원섬유, 동일방직 노동자) 박순희 / 박순애 / 황영애 / 이숙희/ 신순애/ 박계현/ 정명자/ 유동우 ㄷ. 협력작가 이시백(소설가) ◇제작기획 의도 ·전태일 열사 50주기 추모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모아 ‘창작판소리 전태일’을 제작하고 공연함으로써 전태일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 ·판소리로 만나는 전태일 그동안 평전, 영화, 만화 등을 통해 그려진 전태일 열사의 서사를 판소리라는 다른 예술양식으로 접근, 해석해 남녀노소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감동을 끌어내고자 한다. ·비극 속의 해학과 포용 열사의 이야기는 비극이나 판소리는 비극만을 담지 않는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태도와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전태일의 올곧은 인식을 판소리는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낼 수 있게 작품을 구성하고자 한다. ·희망의 메시지 영원한 청년 전태일의 정신(공평, 평등, 정의, 약자에 대한 배려, 헌신, 따뜻한 공동체, 존엄, 인권 등)을 계승하며 동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과 어울리는 내용을 담아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공동체적 기념축제의 장 청년소리꾼과 노동자 소리꾼 등 다양한 계층이 출연하고 관객들의 참여로 함께 완성해가는 공연을 만듦으로써 공연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기념축제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이 작품을 직접 작창하고 소리하는 ‘우리시대의 광대’ 임진택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1970년대 중반 명창 정권진님(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이른바 ‘비가비광대’다. 그는 1970년대 이후 마당극 운동을 주도한 연출가이자 문화운동가이며 특히 전통판소리의 박제화를 극복한 ‘살아있는 판소리꾼’이다. 그가 1985년에 발표한 창작판소리 ‘똥바다(원작 김지하)’는 당시의 한일관계를 통쾌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창작판소리의 신기원을 열며 한 시대를 풍미한 바 있다. 그 소리꾼 임진택이 50년 동안 가슴 깊이 간직한 전태일 열사에 대한 존경을 담아 문화운동가로서 마음에 진 빚을 갚기 위해 호쾌한 한판 창작판소리로 내놓는다. ◇제작발표회 진행순서 - 인사말 - 제작의도 발표 - 제작 협력단체 인사말 1. 이수호(전태일50주기범국민행사위원회장) 2. 이상수(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장) 3. 최종태(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장) - 작품 개요 설명 임진택 명창 : 작품 의도와 창작방향 - 작품공연 일정 소개 - 질문 및 인터뷰 진행 - 마무리 ◇창작판소리 ‘전태일’ 기자 시연회 보도자료 및 제작개요 창작판소리 ‘전태일’ 언론 시연회 전태일50주기, 노동자의 후원과 노동자의 참여로 제작된 창작판소리 전태일 11월 21일(토) 첫 공연에 앞서 전태일기념관에서 제작발표회 및 언론 시연회 진행 - 공연 일정 제작 발표회 및 언론 시연회: 11월 4일(수) 오후 4시 / 전태일기념관 전태일50주기추모 행사 공연(전태일의 마지막 편지_상여소리 대목): 11월 13일(금) 오전 11시 /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묘역 서울 1차 공연(창작초연): 11월 21일(토) 오후 3시 /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글로리아홀 창작판소리연구원(예술총감독 임진택)은 전태일50주기를 맞아 제작한 창작판소리 ‘전태일’ 언론 시연회를 11월 4일(수) 오후 시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삶과 정신이 평전과 만화, 영화 등의 콘텐츠로 만들어진 바 있으나 전통연희형식인 판소리로 제작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창작판소리 ‘전태일’은 임진택 명창이 ‘전태일 평전’을 바탕으로 삼고 갈무리된 열사의 일기와 수기, 친구와 동료들의 증언 기록을 참조하여 수 개월여 공력을 들여 만든 작품이다. 창작판소리 ‘전태일’은 전태일이라는 착하고 바른 청년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순간순간을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작품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를 지금 다시 꺼내어 판소리로 구성한 이유에 대해 임진택 명창은 "짧았던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이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깊고 굵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가 절규한 피의 목소리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 인간존엄의 추구, 따뜻한 공동체를 희망했던 전태일 형(兄)의 정신으로 현재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공연이 노동자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한편 노동자들이 직접 소리꾼으로 참여한다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9월 전태일50주기범국민행사위원회와 함께 창작판소리연구원과 창작판소리 ‘전태일’의 제작 MOU(업무협약)를 체결하고 제작비 지원을 위해 후원물품을 판매하는 등의 힘을 보탰다. 이번 창작판소리 ‘전태일’ 공연은 일반적인 판소리 형식에 변화를 주었다. 한 사람의 광대가 일인다역을 하는 전래의 방식에서 다수의 소리꾼이 청년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시다, 동료, 분신현장 목격자 등 배역을 맡는 입체창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노동자 소리꾼들이 목격자 역할로 참여해 전태일 시대를 증언하는 것은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창작판소리 ‘전태일’은 11월 21일(토)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첫 공연을 확정했고 11월 13일(금) 경기도 모란공원에서 열리는 ‘전태일50주기추모행사’에서 공연의 일부를 선보일 예정이다. 첫 공연 후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 공장과 노동현장 순회공연이 계획되어 있다. ◇창작판소리 ‘전태일’ 제작개요 작품명: 창작판소리 ‘전태일’ 공연 일시: 2020년 11월 21일(토) 오후 3시 / 창작초연 공연 장소: 서울시 종로구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 창본(사설): 명창 임진택 책임집필 / 이시백(소설가) 협력집필 작창: 임진택 실연(實演) 임진택(도창): 서울대 문리과대학 외교학과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 창작판소리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뱀범김구’, ‘남산한성’, ‘다산정약용’, ‘윤상원가’, ‘세계인장보고’ - 완판창막창극 ‘춘향전’, 마당창극 ‘비가비명창 권삼득’ 등 총연출 - 영화 ‘천년학’ 소리꾼 유봉역(임권택 감독 100번째 작품) - 전주세계소리축제, 세계야외공연축제 등 집행위원장 및 총감독 역임 전태원(청년 전태일): 중앙대 국악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 제37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일반부 차상 - 제32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판소리일반부 금상 양승은(시다, 미싱사, 어머니): 중앙대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 전주 세계소리축제 ‘적벽에 불 지르다’ 출연 - 제8회 임방울류 적벽가 연창 발표회 - ‘세월호 판소리-맹골도 앞바다의 슬픔’ 공연 - 독인 뮌헨 ‘아리랑코리아 축제’ 출연 - 국악 기반 밴드 ‘국쿠스틱’ 보컬 (‘2018 청춘 버스킹’ 입상, ‘21C 한국음악프로젝트’ 입상) 최효동(고수): 중앙대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졸업/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전수자 - 제19회 박동진판소리명창 명고대회 고수부문 명고부 최우수상 - 제1회 서천 전국 국악 경연대회 고법 일반부 대상 - 제13회 박동진판소리명창 명고대회 고수부문 일반부 최우수상 배재정(목격자, 아버지): 전)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장 박선봉(목격자, 근로감독관): 문화활동가/김미나 명창 판소리 사사 - 인천에서 공장생활 - 전) 민주노총 문화국장 김호정(목격자, 형사): 노동자 판소리패 ‘한판’ 회원 - 현) 전국사무연대노조 교섭위원장 - 전)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공동의장 박순희(상여소리): - 전) 원풍모방 노동자 박순애(상여소리): - 전) 원풍모방 노동자 황영애(상여소리): - 전) 원풍모방 노동자 이숙희(상여소리): - 전) 청계피복 노동자 신순애(상여소리): - 전) 청계피복 노동자 박계현(상여소리): - 전) 청계피복 노동자 정명자(상여소리): - 전) 동일방직 노동자 유동우(상여소리): - 전) 삼원섬유 노동자 작품 규모: 90분 내외 주최: 창작판소리연구원(원장 임진택) 주관: 전태일50주기범시민행사위원회,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현대자동차지부 ◇공연 내용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노동자들의 권익을 부르짖었던 노동운동의 투사.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여렸던 스물두 살의 청년 전태일. ‘창작판소리 전태일’은 전태일이라는 착하고 바른 청년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불꽃 같은 삶의 과정을 판소리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작품 구성 1. 전태일의 어린시절 서울생활 2. 부산 영도에서의 죽음 체험 3. 영천역과 역전 식당에서 벌어진 일 4. 서울로 떠나는 어머니 5. 태일이 엄마 찾아 서울거리 헤매는 대목 6. 평화시장의 내력과 시다 생활 7. 재단사의 길- 시다의 꿈 - 피 토하는 미싱사 8.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다. 9. 바보회 창립과 노동실태조사 준비 10. 전태일, 삼각산의 결단 11. 삼동친목회 결성 - 근로실태조사 확대 - 노동청에 진정서 제출 12. 경향신문 기사특보 + 회사 측과 노동청의 기만 13. 근로기준법 화형식 - 전태일의 분신(焚身) 14. 전태일의 마지막 편지(유언) - 상여소리 창작판소리연구원은 임진택류 창작판소리 작업을 지속해서 추진·확대하기 위해 2009년 12월 창작판소리12바탕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2018년 11월 창작판소리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작품으로는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김구재단 지원’, ‘남한산성/경기문화재단 지원’, ‘다산 정약용/경기문화재단’, ‘윤상원가/광산구청 지원’, ‘세계인 장보고/완도군청 지원’을 제작·공연했다. 언론연락처: 창작판소리연구원 양정순 02-733-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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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판소리 등재 14주년 기념』 여성국극“삼거리 연가 공연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판소리 지정! 그 후 2003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그 판소리의 기반을 둔 세계적으로 가장 독창적인 대한민국 여성전통뮤지컬 !   2013년 , 2014년 , 2015년, 2016년 , 2017년에는 가무악(歌.舞.樂)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현대적 감각의 전통연희극!「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판소리등재 14주년 기념 여성국극 삼거리 연가(부제: 능수버들) 공연」   전통연희 극이 갖는 풍자와 해학의 감성코드를 전달하는 소리와 춤, 음악이 조화되는 공연으로 대사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창’ 부분은 판소리 창법과 대중들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국악가요, 그리고 전통춤사위를 가미시켜 듀엣과 군무가 잘 어우러진 완벽한 가무악극의 스타일로 재창조해 보았다.   현대적 감각에 맞는 대사처리와 빠른 극의 전개로 극적 호기심과 재미를 자극시켜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극의 집중력을 올려 전통연희 극의 참맛을 보여 줄 것이다. ※ 공연 일정 ○ 일   시 : 2017년 10월 12일(목) ~ 13(금) 오후 7시30분 (총2회) ○ 장   소 : 국립극장 KB 청소년 하늘극장 (서울 중구 장충동소재) ○ 관 람 료 : 전석 2만원 (학생,장애인및60세이상,2인이상 단체 50%할인) ○ 문    의 : (사)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02)741-1535, 010-6266-6190 ※ (스텝)    예술총감독   홍성덕   현,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    대      본   김재복   현, 여성국극 극작가    연      출   박정곤   현, 국악연출가. 여성국극 ‘자유부인’.                              ‘견우와 직녀’. ‘예인 황진이’ 등 다수 연출    안      무   유영수   현, 류무용단 대표, 한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조  연  출   박황춘   현, 여성국극 연출부, 극작가       ※ (출연진)   박현수  이옥천 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능  소  김선미 현, 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   유봉서  이미자 현, 여성국극 원로배우   주  모  임일애  현, 여성국극 원로배우   악덕진사 허숙자  현, (사)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이사장   팔  남   전예주  현, 광주 임방울 국악대제전 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언  남   남덕봉  현, 여성국극 원로배우     팔  자   한수경  현, 연극배우   언  년   이계순  현, 대한민국여성전통예술경연대회 국회의장상   외 35명의 출연자 및 스텝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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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창작판소리 <남한산성> 5월 20일지난 4월29일 하남과 5월3일 성남에서 개최된 창작판소리은 많은 관람객들의 호응과 찬사 속에서 성황리에 공연이 개최되었다. 이어서 5월20일 서울에서 상반기 공연 일정을 마무리한다. 창작판소리 은 창작판소리12바탕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예술총감독 임진택)가 경기문화재단(대표 권영빈)의 지원을 받아 1년여의 준비를 거쳐 완성한 것으로 이번 공연을 통해, 판소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기념비적인 작품임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로써 전승되어온 옛 판소리 다섯바탕(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흥부가)외에 작년 에 이은 ‘임진택 류' 창작 판소리 한 바탕이 다시 추가되어 판소리의 새로운 역사가 무대 위에서 쓰여 진다. 창작판소리 개요 ㆍ창본사설 : 임진택 ㆍ작창실연 : 임진택, 한승석 ㆍ고수 : 이규호, 강민수 ㆍ병풍그림 : 류연복 ㆍ작품분량 : 완창 2시간 20분 내외 ㆍ제작지원 : 경기문화재단 ㆍ주 관 : 창작판소리12바탕추진위원회 공연 일정 ㆍ5월20일(금) 저녁 7시 서울 남산국악당(한옥마을 내) 공연 관람 (031-510-5409) ㆍ전석 초대 공연 □ 보도 내용 창작판소리은 지난 4월29일 하남, 5월3일 성남공연을 통해 많은 관람객들의 찬사와 감동을 이끌어내며 5월20일 서울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이 작품은 경기문화재단(대표 권영빈)과 창작판소리12바탕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예술총감독 임진택)가 1년여의 준비를 거쳐 완성한 것으로 경기도 내 여러 중요 문화유산의 역사 ․ 문화적 가치를 대표적인 민족예술양식인 판소리로 창작하여 알리는 첫 작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공연의 막을 올렸다. 국내초연지역인 하남과 성남에서의 창작판소리공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우선 등재를 확정하고 있는 남한산성, 또한 문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판소리의 미학으로 풀어낸 것은 문화 유적의 가치와 민족예술을 아주 적절하게 결합시켜낸 작품으로 독보적이라는 평가와 긍정적인 찬사가 이어져 서울 공연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 작품은 호국의 성지 ‘남한산성'에 얽힌 갖가지 설화와 역사를 판소리로 풀어낸 것으로,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남한산성의 고난과 항쟁과 굴욕을 비장과 해학에 실어 표현하고 있다. 특징으로는 그동안 계승 되어오는 판소리 다섯 바탕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흥부가)과는 달리 문화유적지인 ‘남한산성'을 의인화한 ‘임진택 류 창작판소리'로서 공연 전부터 전문가들과 관계자들의 기대와 주목 속에 공연을 개최, 이에 부응한 완성도 높은 공연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점이다. 임진택의 창작판소리는 창작판소리의 3대 유파 중 하나로서, 정통 판소리의 법통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일반시민들이 흥겨움과 유쾌함으로 소리판에 참여하여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창작, 실제로 하남과 성남의 관람객들은 적절한 추임새와 흥으로 공연에 참여하여 공연장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남한산성의 장구한 역사를 ‘국난극복의 성지'의 관점으로 다룬 창작판소리 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명창 임진택과 명창 한승석이 각각 소리를 맡아 총 2시간 20분에 걸쳐 완창하게 된다. 무대배경으로는 남한산성의 병풍과 걸개그림을 별도 제작 설치하여 하늘이 지은 성(天作之城)이라 하는의 미학을 시각적으로도 깊이 있게 느껴보는 기회를 관람객들에게 함께 제공하고 있다. 상반기 순회공연의 마지막인 서울 공연은 5월20일 저녁 7시 서울 남산국악당(한옥마을 내)에서 열리며 전석 초대공연이다. (문의 031-510-5409) 9월 이후에는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뜰에서 특별한 공연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 창작판소리 3대 유파(類派) 소개 ○ 박동실 류 젊은 시절부터 '오가전집'에 능통하고, 학식을 겸비한 명창으로 소문이 났다. 법제는 서편제의 큰 줄기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특히 일제시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거한 유관순 안중근 등 열사들의 행적을 담은 '열사가'를 창작하여 당대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거의 유일한 명창이었다. 그러나 민족분단과정에서 북한에 남게 된 선생의 ‘열사가'는 남한에서 기피되어 명맥이 끊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남북관계의 변화를 맞아 제자들에 의해 그 가치가 복원되어 부분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 박동진 류 1916년 충남 공주 출생. 나이 50이 넘도록 뒤늦게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득공을 하였으며, 넘치는 재담과 몸짓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솜씨가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5시간이 넘는 완창을 시도한 것은 판소리 공연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변강쇠타령, 배비장전, 강릉매화전, 옹고집전, 장끼타령 등 실전된 옛 판소리들을 복원 완창하였고, '이순신장군 일대기', '성서 판소리' 등 방대한 분량의 신작 판소리를 작창하였다. ○ 임진택 류 1950년 전북 김제 출생. 70년대 이후 한국 마당극의 창시자이자 창작판소리의 독보적 존재. 서울대 재학 시절 탈춤과 연극을 익혀 이를 통해 문화운동을 펼치고, 명창 정권진 선생으로부터 '심청가'를 사사했다. 그가 젊은 시절 작창한 판소리는 주로 김지하 시인의 담시들로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등 정치사회적 주제가 강한 작품들이었고, 그가 직접 사설을 쓰고 작창한 판소리 '오월광주'는 옛 법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기법을 가미한 최초의 본격 창작판소리로 꼽힌다. 2009년 창작판소리12바탕 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를 결성하여 예술총감독을 맡아 창작판소리 작업을 재개하였다. 현재 12바탕 중 와 을 완성하였고, 향후 등을 판소리로 창작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작품 틀거리 1부 : 남한산성의 유래와 축성 ․ 남한산성 - 하늘이 만든 높은 성곽 ․ 급변하는 정세, 위태로운 나라 ․ 어기영차~ 성을 쌓세! ․ 이회장군과 매바위 전설 ․ 산성마을 사람들 ․ 도원수 김자점의 무능과 독선 ․ 호란의 소용돌이 - 인조의 피난 ․ 서흔남과 곤룡포 설화 2부 병자호란 - 항쟁과 굴욕 ․ 나만갑의 계책과 전투에서의 승리 ․ 고립된 산성에서의 시련 - 추위와 기아 ․ 항쟁이냐 항복이냐 - 척화파와 주화파 ․ 체찰사 김류의 독단과 북문전투 대패 ․ 인조의 꿈과 이서의 죽음 - 숭렬전 ․ 기개있는 선비들, 그리고 삼학사 ․ 남한산성의 통한 - 삼전도의 항복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거점 남한산성 ․ 남한산성의 가치와 문화유적 답사 ․ 천오백년 성(城)이 들려주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 □ 출연진 임진택 명창 - 창작판소리 남한산성 창본 집필 및 작창 실연/ 마당극 연출가/ 축제 총감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외교학과 졸업 -정권진 선생께 판소리 심청가, 춘향가 사사 -창작판소리 ‘소리내력' ‘오적' ‘똥바다' ‘오월광주' ‘백범 김구' 등 작창, 실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 사무총장, 부회장 역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초빙교수 역임 -임권택 감독 100번째 영화 유봉역 출연 -현) 창작판소리12바탕추진위원회 예술총감독 *음반: 창작판소리 *저서: 한승석 명창 - 창작판소리 남한산성 작창 실연/ 중앙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중앙대대학원 한국음악학과 졸업 -성우향 선생께 춘향가 이수/안숙선 선생께 적벽가, 수궁가, 심청가, 흥보가 이수 -김청만 선생께 고법, 이광수 선생께 비나리, 사물놀이 사사 -김덕수, 김오현 선생께 굿 음악 사사 -국립창극단 단원 역임 -현) 중앙대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연희예술전공 교수, 그룹「푸리」보컬리스트 / 우리소리「바라지」예술감독 *음반:공동 발매 *저서:공저 □ 출연진 이규호 : 창작판소리 남한산성 고수/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연구원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음악학과 졸업 -박초선선생께 흥보가 사사 /김여란선생께 춘향가 사사 -박봉술선생께 적벽가 사사 /성우향선생께 심청가 사사 -김명환선생께 판소리 고법 사사 -국악FM방송국 국악특강 진행 (판소리편) -현)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연구원 강민수 : 창작판소리 남한산성 고수/ 중앙대학교 출강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김제전국농악경연대회 장원(국무총리상) -전국고수대회 명고부 대상(국무총리상) -중앙대학교 출강 -현 우리소리“바라지”동인 □ 남한산성 병풍 및 걸개그림 제작 류연복 : 남한산성 병풍 및 걸개 제작/ 판화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서울미술공동체 주무역임 -민족미술협의회 사무국장역임 -민예총대외협력국장 역임 -현)안성에서 목판화 작업에 몰두 -창작판소리 병풍 제작 -개인전 : , , , , 으로 이어짐 *판화집 :「갈아 엎는 땅」 「먹감나무 한그루」 「아름다운 동행」 「새들은 과외 공부를 하지 않는다」「둥글어진다는 것은 낮아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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